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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근대 철학의 선구자

by 철학의 대가 2024. 2. 2.

데카르트 근대 철학의 선구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자신의 철학을 표현한 명언인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근대 철학의 문을 열었다. 이 명언은 데카르트의 철학적 사고의 핵심을 담고 있다. 데카르트는 이 명언을 통해 모든 의심을 거부하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인정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모든 지식을 의심하고, 의심에 대한 의심을 거듭해 가며 의심할 수 없는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존재를 생각함으로써 인정하게 되었다. 이런 의식적 사고의 과정은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고, 인간의 의식과 존재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을 학문의 제1 원리로 정립했다. 이 명제는 모든 다른 지식의 기초가 되며, 의심할 수 없는 참된 진리로 여겨진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접근은 중세의 전통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근대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Cogito, ergo sum"을 기반으로 데카르트는 신 존재를 증명하고, 이를 물질 세계의 진리성을 확보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활용했다. 그는 물질 세계에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연장'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은 물질 세계가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공간임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은 근대의 수많은 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의 철학적 사고는 자연과학과 수학의 급격한 발전을 이끌었다. 그는 중세의 사상을 거쳐 근대 세계로의 관문 역할을 하며, 이를 통해 서양 철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따라서 데카르트를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칭하는 것은 그의 업적과 영향력을 정확히 반영한 표현이다.

르네 데카르트의 어린 시절과 학문적 경험

데카르트는 프랑스 투렌 지방의 투르 근처 소도시 라에에서 조아킴 데카르트와 잔 브로샤르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은 지 1년 1개월 후에 세상을 떠나고, 데카르트 역시 어린 시절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결핵 징후를 보이며 생명의 위태로움을 겪었지만 다행히 생존했다. 어린 시절에는 친구가 부족했지만, 간호사와 사팔뜨기 소녀 친구 프랑수아즈와의 우정이 데카르트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

데카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였지만, 몸이 약한 편이었다. 어머니의 결핵을 유전받은 것으로 보이며, 아버지는 아들의 일찍 죽을 것을 걱정하여 학교를 가지 않도록 말리고 쉬게 했다. 하지만 8세 또는 10세 때 라플레슈 학교에 입학하여 8년간 공부했다. 몸이 약해서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공부는 탁월했다. 특히 교장은 데카르트의 재능을 알아보고 수업 대신 늦게까지 자는 것을 허락하여 데카르트의 사색과 생각을 키우게 했다.

라플레슈를 졸업한 데카르트는 푸아티에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과 의학을 배웠다. 20세에 법학사 학위를 받은 그는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후 데카르트는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뛰어난 지성과 철학적 사고를 전개하며 근대 철학의 중요한 인물로 거듭났다.

군인 생활과 수학적 경험

데카르트는 젊은 시절에 검술 마스터 샤를 베나르에게 검술을 배웠다. 그리고 20대에는 세계를 배우기 위해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만큼 데카르트 집안은 돈은 많았지만 귀족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가정에서 군대 병사 훈련을 받을 정도로 돈이 있었으며, 군인 신분임에도 비교적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네덜란드의 마우리츠 공 휘하에서 군복무를 거쳤다.

데카르트가 네덜란드로 향한 1617년, 그는 장교로 임명되었다. 군대 생활을 하면서 데카르트는 검술 수련뿐만 아니라 군사적 무력과 전쟁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무용술뿐만 아니라 결투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으며, 여행 도중 해적에게 습격당하는 위기를 겪으면서도 그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타고난 체질이 약해서 병에 쉽게 걸리는 편이었다.

데카르트가 네덜란드로 간 시기에는 수학자 이사크 베이크만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거리에 걸려 있는 네덜란드어 글을 프랑스어나 라틴어로 번역해 달라는 부탁을 한 데카르트에게 당시 홀란트 대학의 학장인 이사크 베이크만이 응답했다. 베이크만은 데카르트에게 수학 문제를 푸는 조건으로 청을 들어 주겠다고 제안했고, 데카르트는 몇 시간 만에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어 베이크만을 놀라게 했다. 이 사건과 함께 베이크만과의 친교는 데카르트에게 수학적 지성을 깨우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데카르트는 그의 생애 동안 다양한 경험과 활동을 통해 현실 세계를 체험하고, 이를 깊이 있는 사유와 철학적 사고로 이어나갔다. 그는 검술의 마스터로부터 시작하여 군인, 여행자로의 삶을 살았고, 수학자 이사크 베이크만과의 만남은 그의 학문적 지향을 크게 바꾸었다. 이 모든 경험과 사고의 흔적은 그의 철학에 깊게 반영되어 있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현대의 학문과 사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인간의 의식과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며, 이는 현대 철학의 중요한 출발점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수학적 기여 역시 현대 과학과 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면에서 데카르트는 그의 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계속해서 영감을 주고 있는 핵심적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세 번의 꿈과 학문의 전환

데카르트는 30년 전쟁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전쟁을 목격하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이를 위해 구교 진영에 속하는 바이에른 휘하 군대에 참전하게 된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페르디난트 2세의 대관식을 관람하며 돌아오는 중, 독일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 세 번의 생생한 꿈을 꾸게 된다.

첫 번째 꿈에서 데카르트는 거리를 걷다가 갑작스러운 폭풍에 휘말리게 된다. 필사적으로 들어간 건물이 그의 과거 다닌 라플라슈 학교였고, 건물 안에는 잘 알고 있는 성당이 있었다. 그는 성당으로 향하려 했지만 바람이 강하게 밀쳐져 다른 지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 지인은 데카르트에게 어떤 사람에게 멜론을 전하라고 하는데, 그 때 꿈에서 깨어난다.

두 번째 꿈에서 데카르트는 안전한 방 안에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들리는 굉음에 놀라게 된다. 그는 이를 천둥이라 생각하고, 첫 번째 꿈의 폭풍이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마치 환각처럼 느껴졌다. 그는 안전한 장소에 있어서 굉음이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세 번째 꿈에서 데카르트는 백과사전이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손을 뻗어 책을 집으려 했을 때, 다른 책인 『시선집 (Corpus poetarum)』을 발견한다. 이 책에서 읽은 시에서 데카르트는 '예, 그리고 아니오'라는 제목의 다른 시를 보게 된다. 하지만 책을 집으려 했을 때 책은 사라지고, 다시 백과사전이 나타나면서 꿈에서 깨어난다.

이 세 가지 꿈은 데카르트에게 깊은 감정과 생각을 안겨주었다. 데카르트는 이 꿈이 자신을 학문의 길로 이끌어주는 것이라 믿었다. 1621년,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5년간의 여행 동안, 그는 순수 수학에 몰두하며 함수의 원리를 처음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파리에 정착한 이후, 1628년에는 파리의 추기경 피에르 드베륄로부터 진리탐구에만 전념할 것을 권유받아 과학을 버리고 철학에 전념하게 된다. 이러한 꿈의 경험은 데카르트의 학문적 전환과 철학적 사상의 기틀을 마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데카르트는 네덜란드 군대에서 군인 생활을 하며 여러 경험을 쌓았다. 그의 첫 번째 꿈은 프랑스를 떠나는 길에 들렀던 평화로운 마을에서 시작된다. 이 꿈에서 그는 성당과 만난 지인의 이야기를 꿈속에서 체험하게 되는데, 이후의 두 꿈과 함께 그의 철학적 전환을 예시하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데카르트는 폭풍 속에서 익숙한 성당을 향해 걸어가는 꿈을 꾼다. 이 꿈에서 그는 폭풍이 내면의 갈등과 죄악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지인의 이야기와 함께 꿈에서 느낀 감정은 그에게 미래에 대한 경고와 깊은 사색을 유도한다.

다음 꿈에서는 데카르트가 안전한 방 안에서 폭풍을 겪는다. 이번에는 외부의 불안이 내면으로 침투하는 것을 꿈속에서 경험한다. 그러나 안전한 장소에 있으면서도 외부의 간섭을 거부하는 자세를 보여주며 내면의 안정성을 찾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준다.

마지막 꿈에서 데카르트는 백과사전과 라틴 시집을 마주한다. 이 꿈은 그가 학문적인 지식과 혼돈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백과사전과 라틴 시집은 그의 내적인 탐구와 학문적인 탐구에 대한 열망을 상징하며, 이를 통해 그는 미래의 방향을 모색한다.

세 번의 꿈은 데카르트의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와 그의 철학에 미치는 영향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꿈들은 그에게 학문적인 길로의 전환이 필요함을 시사하며, 데카르트는 결국 군인 생활을 포기하고 학문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후 데카르트는 수학과 철학에 몰두하며 현대 철학의 기반이 되는 작업을 이어가게 된다.

연애와 딸 프랑신

1634년 5월, 암스테르담에서 전직 가정부인 헬레나 얀스 판데르스트롬을 만난 데카르트는 그와의 관계에서 특별한 순간을 경험합니다. 이들은 1635년 7월 19일 데벤테르에서 외동딸 프랑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프랑신이 데카르트와의 관계에서 나온 외동딸임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프랑신을 자신의 조카로 소개하며 정통적인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신의 이름은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소녀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설과, 기계와 관련된 프란치니 형제의 성씨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름의 선택은 데카르트의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638년에 데카르트가 프랑신과 함께 놀아주는 장면을 묘사한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는 데카르트가 어린 소녀를 무릎에 앉혀놓고 박수를 치는 모습이 나타나며, 데카르트가 자신과 프랑신 사이의 동화를 어떻게 썼을지 추정할 수 있습니다.

1640년, 데카르트는 프랑신을 프랑스로 데리고 간 후, 자신의 외할머니의 조카인 프랑수아즈 뒤 트롱셰에게 맡겨 교육을 받게 합니다. 하지만 프랑신은 5살에 성홍열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 손실은 데카르트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으며, 그는 슬픔을 이기기 위해 자신을 다독이는 편지를 친구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1643년, 신학자 기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로부터 데카르트는 혼외관계에서 아이가 있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이후 데카르트는 헬레나와 헤어지게 되며, 헬레나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됩니다. 이로써 데카르트는 평생 독신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장미십자회와 위트레흐트 논쟁

데카르트는 젊은 시절 동안 친구들과 유흥을 즐기는 모습을 보였지만, 갑자기 학문에 몰두하게 되면서 그의 친구들은 그가 장미십자회 회원일 것이라 추정했습니다. 당시에는 수학과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장미십자회의 회원이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는 이 비밀 결사 단체에 가입하고 싶어했지만, 그들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데카르트는 훗날에도 장미십자회와의 어떠한 연관성도 부인했습니다. 1637년까지도 장미십자회 회원이라는 소문에 시달리며 이 혐의를 반박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방법서설』에서 "머릿수만큼의 개혁자가 있었다."라고 언급하며 개혁자를 반대하며 장미십자회와의 거리를 두고자 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뜻을 분명히 표현하며 "그릇된 여러 학설에 속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1647년, 위트레흐트 대학 학장 보에티우스의 공격으로 데카르트는 신학적인 사상 논쟁에 휘말렸습니다. 데카르트의 철학이 유럽의 몇몇 대학에서 채택되면서, 낡은 신념을 고수하는 세력들의 반감을 샀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보에티우스는 데카르트가 장미십자회 회원이며 무신론자라 주장하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데카르트는 무신론자라는 공격에 겁을 먹었지만, 동시에 가톨릭 신자임을 강조하여 항변했습니다. 이 사건은 데카르트가 네덜란드를 떠나 스웨덴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대의 데카르트 전공학자들은 데카르트와 장미십자회의 관련성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데카르트가 장미십자회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아직까지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암호로 사용된 용어의 유사성과 꾼 꿈과 장미십자회 철학 간의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여전히 미스터리한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웨덴에서의 말년

1649년, 데카르트는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던 네덜란드에서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의 간곡한 초청을 받아 스톡홀름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에 대한 생각이 없었던 데카르트는 여왕의 간곡한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여왕은 데카르트가 계속해서 초청을 거부하자 스웨덴 군함을 보내어 데카르트를 태워오게 했고, 데카르트는 이에 항복하여 여왕의 초청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주 후, 데카르트는 여왕의 특이한 요구에 직면했습니다. 여왕은 매일 새벽 5시에 왕궁으로 와서 데카르트에게 철학 강의를 듣고자 했습니다. 이는 데카르트에게 어려운 일정이었는데, 그는 원래 몸이 약해서 오전 늦게까지 잠을 자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는 수도원 시절에도 일찍 일어나는 것을 면제받았을 정도로 체력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여왕은 데카르트의 철학에 빠져들어 정해진 강의 외에도 매일 몇 시간씩 혼자서 공부하며 데카르트에게 다양한 주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여왕의 총애를 받아 정통 프랑스 철학과 가톨릭 신앙의 영향을 스웨덴에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스웨덴 생활은 즐거운 일만이 아니었습니다. 여왕의 정체불명한 죽음과 데카르트를 통한 프랑스와 가톨릭의 영향에 분노한 신하들은 데카르트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데카르트는 적대감을 느끼고, 스웨덴 행을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1649년 2월 3일, 데카르트는 과로, 스웨덴의 혹독한 겨울 날씨, 독감에 따른 폐렴으로 병에 걸려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사망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으며, 독살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데카르트가 죽은 후 몇 년이 지난 1666년 10월 2일, 그의 시신이 발굴되어 프랑스로 운송되었습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두개골은 사라진 채 발견되지 않았고, 스웨덴 경매장에서 나타나게 된 이후 현재는 프랑스 인류학 박물관에서 소장되고 있습니다. 두개골은 훼손된 상태로 보관되어 있으며, 데카르트의 생애와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한 점을 남기고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회의주의와 방법적 회의

1562년과 1569년에 라틴어로 번역되고 출판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저작들은 몽테뉴와 샤롱 등에 의해 영향을 받아 고대의 회의주의가 다시 대세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종교전쟁이 벌어지면서 신 중심의 진리관에 대한 회의가 세계를 뒤흔들었다. 데카르트는 회의주의가 만연한 이 시기에, 회의주의를 다시 회의함으로써 더 이상 회의할 수 없는 확실하고 객관적인 진리를 합리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라 불리는 철학적 방법을 통해 진리를 찾고자 했다. 이 방법은 모든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의심을 통해 반박할 수 없는 논리를 찾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선입견과 관습들을 의심하며 시작했다. 첫번째로 의심한 것은 인간의 감각이다. 감각에 의해 획득된 지식 중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거짓으로 드러났는지를 의심하였다.

데카르트는 두번째로 나의 몸 자체가 실재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심을 제기했다. 꿈 속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연출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몸이 실재로 존재한다'는 앎이 의심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물질의 보편적 특성과 수학적 명제들은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을 담고 있다고 판단하여 이를 '꿈의 가설'에서 제외시켰다.

세번째로 데카르트는 물질의 보편적 특성과 수학적 명제들에 대한 의심을 품기 위해 '악마의 가설'을 도입했다. 이에 따르면, 어떤 나쁜 신의 조종에 속아 모든 것이 기만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물체가 어떤 공간을 점유하는 연장이나 산술적 명제도 이 신의 기만에 의해 속아 우리가 믿는 진리가 의심될 수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검토한 결과, 단 한 가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것은 '생각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생각하는 한, 속고 있는 나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바탕으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선언하며, 이것이 모든 학문의 제1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데카르트는 회의주의를 통해 찾은 확실한 지식의 출발점을 마련하였다.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과 순환논증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두 가지 방식으로 증명한다. 첫 번째는 인과론적 신 존재 증명으로, 불완전성은 완전성과 대면했을 때에만 드러날 수 있다는 주장에서 시작한다. 이는 모든 의심은 완전한 관념에 대한 의심이라는 관념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데카르트는 '완전성에 대한 관념'이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본유관념이라고 주장하며, 이 완전하고 무한한 신의 관념이 나로부터 생겨나기는 어렵다고 한다.

두 번째는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으로, 신 이외의 피조물은 신에 의해 창조되는 한에서만 그 현존의 가능성이 있으며, '신'은 자기 존재를 산출할 수 있는 전능한 존재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현존을 보존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신'과 '필연적 현존'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피에르 가상디는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에서 일종의 순환을 발견한다. 데카르트는 "신에 대한 관념이 유한한 우리의 머리속에 있는 까닭은 신이 있기 때문이며, 신은 완벽하기 때문에 신은 현실세계에 실재로 존재한다."는 주장에서 순환 논증의 시작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즉,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알기 위해 이미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순환논증은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데카르트의 순환논증(Cartesian circle)'이라 불리며, 가상디의 지적이 타당함을 인정받고 있다. 순환논증은 데카르트의 증명이 내재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철학적 논의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